우리는 빈센트 반 고흐를 바람과 비에 시달리거나, 태양 아래 시들어가는 해바라기 들판에서 미쳐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반 고흐에 대한 또 다른 사실이 있는데, 편안한 중산층의 빈센트가 상투 모자와 코트를 입고, 빅토리아 런던으로 출퇴근하며, 주말 동안 템즈강에서 노를 젓거나, 켄싱턴 정원에서 산책을 하면서 보냈다는 것이다.
20대 초반의 반 고흐는 코벤트 가든 구역에 있는 그들의 지사인 국제 예술 거래 회사 구필 앤 시에서 어시스턴트로 일하기 위해 그의 고향 네덜란드에서 런던으로 이주했다.
반 고흐는 런던에서 단 한 점의 그림도 그리지 않았지만, 테이트 브리튼에서 열린 새로운 전시회인 "반 고흐와 영국"이 분명해짐에 따라,영국 수도에서 보낸 시간은 그의 작품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수요일에 개막되어 8월 11일까지 계속되는 이 전시회는 이 전람회는 고흐의 사상가로서의 비전을 우리에게 제공할 것이고, 또한 그 주변의 문화적 영향, 특히 19세기 영문학을 활용했으며 그의 작품에는 영국의 일러스트, 판화, 회화도 다수 인용했다.
쇼의 수석 큐레이터인 캐롤 자코비는 말했다. "영국과의 관계를 통해 작품을 보면 그의 놀라운 지적 호기심이 앞서요"
벨기에에 본사를 둔 오리안과 큐레이터이자 독립 예술가 스라르 반 허그텐은 "반 고흐가 영국 생활을 했던 때 같이 좀처럼 알려지지 않은 일상에 대한 연구는 고흐의 오래된 야만인 이미지를 서서히 교체하면서, 예술가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미지를 제공한다"고 말했다.
"반 고흐가 생각 없이 매우 빠르게 작업한 자발적 화가는 아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고 반 허그텐은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는 대중 과학뿐 아니라 문학까지도 폭넓게 읽었어요. 작품을 세심하게 연구해 보면 자신의 작품을 세심하게 생각하고 준비하는 사람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반 고흐는 네덜란드의 가족연줄을 통해 구필 갤러리가 있는 런던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빈센트와 그의 동생 테오 모두 헤이그 지사에서 먼저 일했고, 테오가 브뤼셀 지사로 옮긴 거의 같은 시기에 빈센트는 런던으로 보내졌다. 그들 둘은 결국 파리 본부에서 일하게 되었지만 테오는 승진했고 빈센트는 2년 후에 해고되었다.
"반 고흐가 상업적인 생활을 했다는 것은 무척 흥미로워요," 자코비 씨가 말했다. "그는 열여섯 살 때 구필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겨우 스무 살 때 런던 지사로 파견되었는데, 이 거대한 도시에 홀로 있었습니다. 집으로 보낸 편지들에 따르면, 그는 예술에 대해 매우 열광적이었어요.“
반 헤그텐은 미술관에서 반 고흐가 "동시대의 예술가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구필에서 판화와 그림을 보고 미술상들과 미술에 대해 대화하게 되었고, 구필 덕에 박물관이 있는 도시에서 살게 되었다.
반 고흐는 1873년 5월부터 1876년 12월까지 런던에서 살았는데, 처음에는 조용하고, 경쾌하고, 멋져 보이는 동네(아직도 알려지지 않은)라고 묘사한 하숙집에서 살다가, 당시 도시 외곽의 중산층 교외였던 브릭스턴 87번지 해크포드 로 이사하여 과부와 그녀의 10대 딸과 함께 살았다. 이후 그는 인근 케닝턴 로드(Kennington Road)에 있는 다른 숙박업소로 이사했다.
그가 갤러리에서 일하기 전, 런던에서 그의 여가 시간의 상당 부분은 영국 박물관과 국립 미술관과 같은 미술 박물관에 자주 드나드는 것이었고, 그곳에서 존 컨스터블이나 존 에버렛 밀레스와 같은 영국 화가들과 처음 만났다.
빈센트는 1873년 7월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 적었다. "영국의 예술은 처음에는 별로 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그것에 익숙해져야 해. 그래도 여기에는 뛰어난 화가들이 있어." 그는 1874년 1월까지 편지에서 17번이나 언급한 밀레를 포함해 런던에서 자신이 존경했던 40여 명의 예술가 명단을 적었다.
테이트 브리튼은 밀레의 '차가운 시월'(1870년)이나 변덕스러운 하늘 아래 들솔, 바람에 날린 나무의 황량한 모습 등 그가 언급한 특정 작품들을 모아봤는데, 그것들은 반 고흐의 1885년 작품인 '해 질 녘 가을 풍경'의 모티브로 사용됐을지도 모른다.
또한 반짝이는 가스등과 안개 낀 경치를 그린 제임스 애벗 휘슬러의 "회색과 금색의 야상곡, 웨스트민스터 다리"는 1888년 반 고흐가 그린 '별이 빛나는 밤'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자코비는 말했다. "반 고흐와 그가 존경하는 작품 사이 작품들 대부분은 일종의 대화에 가까워요. 아이디어에서 함께 뛰노는 것이 보이네요."
반 고흐는 결국 "상업계와 함께 몰락했다"고 자코비는 말했다. 런던 직책에 대한 그의 열의 부족이 눈에 띄었고, 그는 1876년 구필에서 해고되었다. 그는 몇 달 더 영국에 머물면서 교사직을 몇 번 더 맡았고, 크리스마스를 위해 네덜란드로 돌아가 목사의 길을 걷기로 했다.
반 고흐는 런던에 있는 동안 자신이 1881년 초가 되고서야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거라고는 전혀 몰랐을 것이다. 그의 인생 말년이 되어서야 거친 반 고흐가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프랑스 남부에서 그는 정신병과 싸우며 거의 하루종일 캔버스 앞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렇다면, 반 고흐는 다른 사람으로 변한 걸까?
암스테르담 반 고흐 박물관의 큐레이터 니엔케 바커는 "사실 이상할 건 없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예술과 문학이 있는 환경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미술관에서 자란 것과 마찬가지예요.“ 그게 그의 성장이었고, 예술가가 되었을 때 그 모든 것을 가지고 가서 우리가 '문명화된 세계'라고 부르는 것에서 벗어났어요."
반 고흐의 후기 작품은 "이 모든 지식과 이미지를 머릿속에 담고 있다"고 그녀는 말했다.
반 고흐의 인생 후반기에 있었던 일, 즉 화가로서 겨우 10년 만에 37세의 병과 빠른 죽음의 비극에 대해 생각하면 그가 런던의 문화와 경치를 흡수하느라 바빴던 이 평화롭고 젊은 시대에서 "반 고흐와 영국"을 거닐며 이 예술가의 삶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위로가 된다.
그는 1874년 1월 런던에서 테오에게 편지를 보냈다. "여기서 잘 지내고 있어. 멋진 집을 가지고 있고 런던과 영국의 생활 방식과 영국인 자신들을 관찰하는 것은 나에게 큰 즐거움이야. 또 자연과 예술과 시가 있는데, 그걸로 충분하지 않겠어?"
출처 | New York Times
원글 | https://www.nytimes.com/2019/03/26/arts/design/van-gogh-tate-britain.html
에디터 | 송도예
스케치북 바로가기 | http://mysketchbook.co.kr/bbs/board.php?bo_table=gallery01&wr_id=209&&stx=%ED%95%B4%EC%99%B8&sop=and&page=1
'해외 미술계 뉴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영리단체가 내 연구물을 인질로 삼았어요.” 모딜리아니 전문가가 말했다. (0) | 2020.06.19 |
---|---|
로이 데카라바의 놀라운 재즈 명곡 사진 (0) | 2020.06.19 |
감정의 예술 : 왜 우리는 분노를 축하해야 하는가 (0) | 2020.06.19 |
칼로 그리고 페르메이르 : 용기가 정말 무슨 뜻인가 (0) | 2020.06.18 |
전염병 그림이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 (0) | 2020.06.1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