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곰 여자"라고 불렀다. 뉴욕 타임즈의 1854년 광고에선 그녀가 "인류와 오랑우탕의 연결고리"라고 말했다. 그녀는 19세기 중반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여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녀가 출산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난 뒤 유럽 전역에서 수십 년간 '프릭쇼'(*생물학적으로 희소한 무언가를 전시했던 행위)에 그녀의 몸과 아기의 몸이 등장했다.
그녀가 죽은 지 1세기 반이 넘은 화요일, 1860년, 줄리아 파스트라나는 마침내 멕시코 시날로아에 있는 그녀의 생가 근처에서 적절한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비주얼 아티스트 로라 앤더슨 바르바타의 10년에 가까운 노력 끝에 오슬로 연구소의 자물쇠 창고에서 그녀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2003년 바르바타의 여동생 캐슬린 앤더슨 쿨브로는 텍사스에서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여성 줄리아 파스트라나의 비극적 삶과 의기양양한 죽음' 무대를 연출했다. 숀 캐스터가 쓴 그 연극은 1998년 런던에서 첫 선을 보였으며 무척 어두운 무대에서 공연했다. 캐런더가스트는 이메일을 통해 말했다. "그녀는 추악하지만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덕에 관객들이 그녀에게 매료되었습니다."
또한 "원숭이 여인"(1964)과 얼터너티브 록 노래, 그리고 만화책을 포함한 영화의 소재가 되었다.
멕시코 시티에서 태어나 시날로아에서 자란 바르바타는 언니의 작품 제작을 위해 의상을 디자인했다. 그녀는 파스트라나의 이야기에 감동했다.
바르바타는 지난 주 오슬로에서 전화통화를 통해 말했다. "나는 그녀가 존엄성과 역사 속에서 그리고 세계의 기억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되찾을 권리가 있다고 느꼈어요. 피해자로서 그녀의 입장을 그녀의 전체적이고 입체적인 모습으로 바꿔주고 싶었습니다.“
파스트라나는 1834년 멕시코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일생 동안 평생 낫지 못한 희귀질환 두 가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얼굴과 몸이 많은 털로 덮인 선천적 다모증과 입술과 잇몸이 두꺼워지는 잇몸 과형성이다.
멕시코의 한 세관 관리자는 1854년에 파스트라나를 구입하여 미국과 캐나다 전역에 걸쳐 그녀를 보여주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인간의 기이한 모습을 전시하는 사업의 일환이었다. (몇 십 년 전 멕시코에선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지만, 그 후에도 여전히 많은 서커스 공연자들이 팔려가곤 했다.) 뉴욕에서 파스트라나는 그녀의 매니저였던 테오도르와 결혼했다.
웨일스 카디프 대학의 류마티스 전문의인 얀 본데슨은 "그녀는 테오도르를 분명히 사랑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의 저서 '의학적 호기심의 내각'에는 파스트라나에 관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그가 그녀와 결혼한 이유가 그가 그녀를 지배할 수 있고, 그려를 이용해 엄청난 수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확신합니다.”
테오도르는 유럽 전역으로 아내를 데리고 다녔는데, 일부 신문과 책에서는 그녀의 외모를 아낌없이 묘사했다. "고릴라를 닮았다" 같은 말로. 하지만 종종 어떤 이들은 그녀의 외모로 인해 그녀의 다른 자질이 가려진다고 느꼈다. 영국의 자연사학자 프랜시스 버클랜드는 1868년 저서에는 적혀있다. “파스트라나는 무척 달콤한 목소리를 지녔으며 음악과 춤에 대한 뛰어난 재능을 가졌고, 3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그녀는 매우 자비롭고, 자신의 수입으로 지역 기관에 많은 돈을 기부했다.”
1859년 파스트라나는 투어 중 테오도르에 의해 임신을 하게 되었다. 그녀의 아기는 그녀의 병을 물려받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지 몇 시간 만에 죽었고, 파스트라나는 5일 후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테오도르는 곧 그의 아내와 아들의 방부처리된 시신을 전시하기 시작했다. 그는 나중에 독일에서 수염을 기른 한 여성을 발견했는데, 그 여성은 그와 결혼하여 파스트라나의 여동생인 "제노라 파스트라나"라고 이름붙였다. 부부는 여행을 했고, 제노라는 시신과 함께 공연을 했다.
테오도르가 죽은 후 파스트라나의 시신은 널리 전시되었는데, 가장 최근에는 1970년대 초 노르웨이의 박람회장 운영자에 의해 전시되었다. 1976년에 도둑들은 박람회장의 상속인이 소유한 창고에 침입하여 파스트라나와 아들의 시체를 훔쳤다.
노르웨이 경찰은 나중에 그녀의 유해를 쓰레기통에서 발견했고, 팔은 잘려져 있었다. 아이의 시신은 수리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됐지만 경찰은 파스트라나의 시신을 오슬로 대학 법의학 연구소로 옮겨 보관하고 있었다. 시신은 이후 이 대학의 기초의학연구소에 있는 기후조절 해부 표본의 방으로 옮겨졌다.
바르바타는 "지하실에서 소장품 수집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품위를 전부 잃게 되었어요. 저의 궁극적인 꿈은 그녀가 멕시코로 돌아가 장례를 치르는 것이었죠."
2005년, 오슬로의 레지던트 기간 동안 바르바타는 파스트라나의 송환을 위해 대학에 탄원하기 시작했다. "처음 받은 답변은 매우 어려울 것 같다는 말이었어요."
그러나 54세의 바르바타는 계속해서 압력을 가했다. 2005년 9월, 그녀는 오슬로 신문에 파스트라나에 대한 사망 공고를 내고 미사를 했다. (파스트라나는 로마 가톨릭 신자였다.) 2008년 바르바타는 파스트라나의 석방을 위한 그녀의 주장을 담은 문서를 노르웨이 국립 인간 유골 연구 위원회에 보냈다. 지난 6월 이 위원회는 "줄리아 파스트라나가 자신의 몸이 해부학적 수집에서 표본으로 남기를 원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오슬로에 있는 기초의학연구소장인 얀 G. 브잘리는 스카이프의 말에 "대학은 파스트라나의 귀환에 대해 긍정적인 검토를 했었지만, 단순히 유해를 요청한 누군가에게 보낼 순 없었다고 말했다.
시날로아 현 주지사 마리오 로페스 발데즈가 지난해 바르바타의 대의에 동참해 파스트라나의 송환을 청원한 뒤 돌파구가 마련됐다. 덴마크,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주재 멕시코 대사인 마사 바흐세나 코퀴는 이 대학과 함께 이 사체를 받아들이겠다고 제안했다.
"우리는 그녀가 생전에 엄청난 고통을 받았을 것이고 그녀의 유골이 수년 동안 마땅히 받아야 할 존경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코키는 이메일을 통해 말했다.
연구소는 지난 8월 파스트라나를 멕시코인 구류지로 이송하는 절차를 시작하기로 합의했다.
지난 목요일 바르바타는 오슬로에 있는 파스트라나의 시신이 봉인되기 전에 신원을 확인했다. 바르바타와 옥스퍼드 대학의 법의학자 니콜라스 마케즈 그란트는 파스트라나의 발에 여전히 그녀의 몸을 전시하는데 사용되는 볼트와 금속 막대가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볼트를 치우고 그녀의 관 발치에 놓았다.
"그녀의 손은 작았어요." 바르바타는 말했다.
파스트라나는 생가 인근 시날로아 데 레이바의 공동묘지에 29일 안장된다. 그녀는 멕시코 언론에서 작은 유명인사가 되었다. 마리아 루이사 미란다 몬레알 시날로아 문화원장은 지난주 기자회견을 열고 이번 매몰이 '착취의 사이클'을 종식시킨 것이라고 말했다.
시날로아에서 발생한 마약 폭력에 초점을 맞춰 관광객을 겁탈하는 언론을 비판해 온 발데즈 주지사가 예배에 참석한다. 지난해 노르웨이 인간존중 윤리위원회에 보낸 그의 서한은 파스트라나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길 호소했다.
바르바타와 이 순간을 염원해 온 다른 사람들에게 화요일의 장례식은 비록 늦었지만 달콤한 해결책이 될 것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항상 나쁜 결말을 맺어왔어요.“ 뉴욕 배우 조나단 필딩이 말했다. 그는 지난해 포트워스의 모피션스 스테이지 프로덕션에서 파스트라나에 관한 프레시더가스 희곡의 제작을 감독했다. "큰 차이점은 이제 적절한 결말을 맺었다는 거네요."
출처 | New York Times
에디터 | 송도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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